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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작들, 권태현





미술은 오랫동안 납작한 것에 세계를 담아내기 위한 기술이었다. 잘 알려져 있는 15세기 유럽에서 본격화된 이른바 선원근법을 중요한 준거점으로 삼을 순 있겠지만, 그 이전에도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를 납작하게 만드는 제각기의 기술들이 존재했다. 한참 지나서야 미술이라고 불리게 되는 그런 기술들은 입체적인 세계를 평평한 다른 물질 위에 올려놓기 위해 세계를 아주 특정한 방식으로 파악해야만 했다. 그런 방법론은 그 당시 그곳의 사람들이 세계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여기에서 문제는 보는 방법이 결코 하나로 수렴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물론 세계를 보는 다양한 방법들 중에서 하나의 관점이 특정 시기에 헤게모니를 잡게 되는 경우는 많다. 지금 우리에게는 여전히 선원근법과 그것이 해체되어 가는 선형적 역사를 중심으로 한 서양식 모더니즘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근대적 원근법이라는 것도 다양한 분열을 가지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 유럽만 보아도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원근법 체계와 플랑드르 지방의 재현 체계는 창문으로 세계를 보는 사람과 지도를 보는 사람의 차이만큼이나 큰 것이었다. 하물며 같은 시기 중국이나 한국 같은 동아시아의 관점은 얼마나 달랐을까.

우리는 지금 15세기에 부상한 근대적 관점을 선원근법이나 일점투시 같은 방식으로 부르지만, 그 당대에는 코멘수라티오(commensuratio)라는 말이 쓰였다. 그것은 ‘측정할 수 있는’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더 엄밀하게 어근을 쫓으면 ‘같은 단위를 공유하는’이란 뜻이다. 이러한 관점은 세계를 체계적으로 측량하여 옮겨 그릴 수 있다는 관념과 연결되는 것이었고, 그 결과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소실점이라는 하나의 점으로 빨려 들어가는 세계이다. 나아가 그것은 단지 시각적 체제에만 머물지 않는다. 유럽식 원근법에서 파생된 세계관을 제국주의와 세계대전까지 연결 짓는 것은 전혀 특이한 관점이 아니다.

유도원의 작업은 이러한 논의에서 파생되는 문제들을 오늘날 맥락에서 예술적 형식으로 연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다중- ’ 연작은 다양한 사물들을 격자 위에 올려 다각도로 여러 차례 촬영한 뒤, 그 이미지들을 조각조각 겹쳐 놓는다. 카메라를 손으로 들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찍은 이미지 조각을 기우듯 연결했으니 하나의 사물은 여러 관점으로 산란되듯 흩어져 버린다. 하지만 그러한 해체의 과정에서도 사물 이미지의 배경이 되는 격자는 흐트러지지 않는다. 사진을 찍은 위치도 환경도 셔터를 누를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기에 다시(時/視)점에서 여러 왜곡이 발생하지만, 배경에 놓은 그리드만은 억지로 끼워 맞추듯 조정하여 거의 완전한 격자를 갖추고 있다. 그 과정에서 사물 이미지의 왜곡과 해체는 더욱 강화되었을 것이다.

물론 배경의 그리드 이미지 역시 복수의 사진들을 이어 붙인 것이기에 조각마다 초점의 예리함도 다르고, 노출이나 색온도에 따라 빛깔이 미묘하게 다르기도 하다. 아무리 비슷한 환경에서 같은 손으로 같은 기계를 조작해도 이미지를 포착하는 순간순간마다 복잡한 사물들의 네트워크가 계속해서 다른 연결을 만들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리드의 격자는 모두 반듯한 네모를 유지한다. 그것은 하나의 기준이 되어 다른 형태들을 모두 찌그러뜨리고 있다. 거기에 더하여 실물에서는 1cm였던 격자 한 칸은 동아시아 척관법 의 1치, 그러니까 약 3.03cm 정도로 작가에 의해 일관적으로 변형되면서 동서양의 힘관계는 의도적으로 이상하게 비틀어진다.

위에서 언급한 코멘수라티오 같은 말에서 드러나듯 측량 체계는 근대적 전환의 중요한 기점이 된다. 물론 근대 이전부터 표준 도량형을 만들기 위한 시도는 세계 곳곳에서 있었지만, 근대의 국제적 표준은 훨씬 강하고 체계적인 것이었다. 근대적 표준 도량형은 그 자체로 세계 질서의 힘관계가 제국주의적으로 재편되는 모습을 표상한다. 영국 중심의 국제 표준 시간 체계, 프랑스에서 만들어져 체계화된 미터법의 국제적 보급 등을 생각해 보자. 이런 표준 도량형은 실용적 차원에서 당연히 필요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에 특정한 하나의 기준을 세운다는 점에 있다. 마치 선원근법과 모더니즘 시각 체계처럼 말이다.

유도원은 이렇게 일련의 작업을 통해 시각적 체제와 도량형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흥미롭게 뒤섞으면서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를 함께 엮어낸다. 바로 동시대 자본주의에서 발생하는 상품 체제의 표준 문제이다.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고도화되면서 제국주의는 글로벌 자본이라는 형식으로 그 모습을 바꾸고 있다. 근대가 형성되는 시기에 서양의 제국들이 세계에 어떤 표준들을 도입했다면, 오늘날에는 세계적인 자본들이 표준을 도입한다. 쉽게 떠오르는 충전기나 저장 장치의 규격 같은 것부터 시작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온갖 물건들에 천편일률적인 표준화가 점점 강화되고 있다. 유도원의 작업에 자주 등장하는 이케아 같은 경우에는 어떤 표준 체계를 도입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같은 상품이 너무 광범위하게 소비되면서 현대인의 생활 양식 전반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서구화된 곳이라면 세계 어디에서든 이케아의 스툴, 옷걸이, 바구니 등 제품들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이케아뿐 아니라 애플, 테슬라, 유니클로, 스타벅스 모두 마찬가지다. 동시대 글로벌 자본들은 가장 미시적인 생활의 관습마저 전체주의적인 표준으로 재편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국제 표준 시간이 세계적인 로지스틱스 구축, 나아가 제국주의적 착취와 연결되는 것처럼 상품 체제에서의 표준화 역시 비판적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쓰는 모든 상품에 스며들어 있는 표준 체계들, 예컨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구글 문서, 이 글이 실릴 인쇄물을 디자인할 어도비사의 프로그램 등 독점에 가까운 표준 체계를 수립한 자본들은 그 영향력을 노골적으로 행사할 필요가 없다. 애초에 그것을 기반으로 우리의 경험과 감각이 구조화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서 유도원은 그런 상품들과 상품들의 체제를 이미지로 변환시켜 납작하게 꾹 누르면서 표준화된 세계에서 살짝 삐져나오는 무언가를 발견해 낸다. 아무리 하나의 체계에 집어넣으려고 해도 결코 납작하게 눌러지지 않는 이상하게 튀어나오는 구석은 어디에나 있다. 모두 똑같은 공산품처럼 보이지만, 모서리를 자세히 보면 마감이 미세하게 다른 것처럼. 제국주의적 표준이나 글로벌 자본이 같은 감각적 체계로 세계를 포착하려고 해도, 그 안에서 제각기 다른 경험을 솟아오르게 하는 힘이 우리에겐 있다. 북유럽에서 디자인된 플라스틱 바구니에 겉절이를 만들어 먹는 것처럼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든 사물은 의도된 지시성에서 벗어날 역능을 품고 있다. 이케아 제품이 등장하는 또 다른 작업인 〈PIR MAP〉 연작은 일반적인 3D 소프트웨어에서 사용되는 RIP MAP에 담긴 투시법을 반대로 뒤집어내면서 원경과 근경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 중심적 관점까지 성찰하며 이러한 문제들을 입체적으로 돌아볼 계기를 마련한다.

영상 작업 〈몸짓들〉은 동시대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인 일론 머스크의 우주 산업 프로젝트 스페이스엑스의 로켓들이 이착륙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모두 인터넷에서 수집한 파운드 푸티지들인데, 영상 편집 소프트웨어로 손 떨림 등 화면의 움직임을 안정화해 주는 기능을 역으로 활용하여 작은 푸티지들이 스크린 곳곳에 유령처럼 떠다니게 만들었다. 푸티지 전체가 화면에서 움직이면서 그 이미지들은 로켓의 움직임만큼이나 영상을 찍은 사람의 움직임을 담아내게 된다. 모두 비슷한 재사용 가능한 로켓 프로젝트의 이착륙 장면이지만, 푸티지 자체가 움직이며 이미지를 찍은 신체성이 오히려 부각되고, 거기에서 이미지의 내용이 담고 있는 보편성은 특이하게 뒤집어진다. 카메라를 손에 쥐고 로켓을 따라가는 신체의 운동이나 손 떨림을 말 그대로 ‘무빙’ 이미지로 포착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유도원의 작업은 상품들의 이미지를 통해 우리의 감각이 담론적으로 구성된 체제에 갇혀 있다는 것을 짚어내면서도 구성주의적 회의 에 빠지지 않는 길을 찾아낸다. 표준이라는 문제를 연구하면서 역설적으로 세계를 하나의 감각적 체계에 포섭하려는 시도에서 벗어나는 사례들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서양 중심의 제국주의적 표준, 글로벌 자본주의 상품 체제는 세계를 끊임 없이 납작하게 누르고 있다. 그러나 억지로 격자에 끼워맞출 때, 세계의 한구석은 비틀어지며 찢어진다. 납작하게 누르는 만큼 이상하게 삐져나오는 것들은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결코 하나로 표준화될 수 없는 복수의 것들이 거기에 있다는 것. 납작은 항상 납작들이라는 것. 보기는 항상 보기들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